성산두 < 산동성 < 중국안내 < 행사안내 < HOME
적산법화원 기본정보 갤러리
위해항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각자 여권 을 먼저 준비 하고 올라가는 것이 유리 합니다
장보고 해상단의 안식처였던 적산법화원. 지금은 산동성 주요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위해 항구에서 1시간 남짓 차로 가면 적산 법화원이 나온다. 갑오전쟁기념관 입구에 걸린, 이홍장이 썼다는 ‘해군공소(海軍公所)’라는 현판이 청말 북양함대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역사를 알게 해 준다. 위해시(市)나 연대시는 근세에 부상한 항구도시지만 당송시대에도 이 연안에는 신라의 배들이 분주히 드나들며 구법스님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강경의식과 송경의례

법화원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산동반도 영성시(榮成市, 당대에는 文登縣 소속) 석도진(石島鎭) 적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도는 원래 섬이었으나 지금은 육지와 연결돼 있고, 적산은 문자 그대로 붉은 돌이 많아 붙은 이름이다. 절에 서면 바다가 바로 보인다.

우리가 들어선 절 입구에는 최근에 돌로 만든 산문이 큼직하게 세워져 있는데 글씨는 근년에 유명을 달리한 중국불교협회 조박초 회장이 쓴 것이다. 절은 중앙에 대웅보전이 앉고, 그 좌우로 관음전과 지장전이 마주하고 있으며, 지장전 내부에는 월전 화백이 그린 장보고 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절에는 비구니스님 7, 8명이 주석하고 있는데 주지 노스님은 구화산 인덕(仁德) 방장 스님의 상좌로서 10년 전에 출가하였으며, 1년 전에 이 절로 옮겨왔다고 한다.

인덕스님은 비구스님인데 비구니스님과의 사자상승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개혁 개방에 숨가쁜 중국 불교가 아직은 그러한 격식을 갖출 겨를이 없어서인가 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적산법화원은 당시 동아시아 해상세력을 주름잡던 장보고 대사가 세운 절이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적산법화원의 경영과 법회에 관한 내용까지도 자세히 전해주고 있다. 장보고 대사는 이 지역에 많은 논밭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 절의 일 년간 양식으로 500석의 쌀을 충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절에는 30~40명의 스님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며, 여기서 행하였다는 강경 의식과 종교 의례로서의 송경의례에 관한 경험담이 매우 흥미롭다. 당시 성림(聖林) 스님이 좌주이며, 돈증(頓證)과 상적(常寂) 스님이 보조강사로서 법회를 주재하였는데 대중은 모두 신라인으로서 승려를 비롯해 속인 노인 젊은이 귀족 평민이 두루 참석하는 무차법회였다고 한다.

법회를 마치기 전날에는 200명이 회향하고, 마치는 날에는 250명이 회향하였으며, 그들 모두 보살계를 받았다. 강경(講經)할 대목이 있으면 질문하고, 강사는 이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송경(誦經) 의례도 신라풍속을 따라 신라말로 하되 낮에는 법화경과 금강경을 강의하고, 밤에는 예불과 참회하는 종교의례를 행한다. 의례 때에는 한목소리로 삼보에 귀의하고 찬불하며, 도사가 인도하는 데 따라 ‘나무약사유리광불‘, ‘나무대자대비관세음보살’을 큰 소리로 복창한다는 등등이다.


옛 신라인의 이국 삶

이와 같이 적산법화원을 중심으로 하여 이 여행기에서 전해주는 재당(在唐) 신라인들의 신앙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가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신라인들의 송경의례는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법화경 영험담이나 고승들의 법화경 연구서는 더러 남아 있으나 실제로 무슨 경을 가지고 어떠한 형식으로 신행 생활을 하였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기록은 신라불교사 이해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삼불보전에서 내려다보는 적산포 앞 바다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옛적 여기 살던 신라인들도 과수를 심고 밭을 갈며 동쪽 바다의 파도소리를 벗삼아 두고 온 산하를 그리면서 열심히 살아갔으리라.






























copyright